‘독사 조련사’ 한국 마라톤 일으키다

김화성의 종횡무진 육상이야기 ⑬

마라톤 중흥 대부 정봉수 감독

이봉주가 마라톤에 눈을 뜬 것은 94년 당시 정봉수 감독(1935~2001)이 이끄는

코오롱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이봉주는 풀코스 8번 완주에 최고기록

2시간10분27초에 불과했다. 우승도 93년 12월에 있었던 호놀룰루 국제마라톤대회(2시간13분16초)가

고작이었다. 그 대회를 우승한 뒤 곧바로 정봉수 감독의 부름을 받고 94년부터 코오롱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코오롱에서 이봉주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코오롱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와

당시 한국 최고기록(2시간8분34초) 보유자인 2년 선배 김완기가 있었다. 이봉주는

어디까지나 2진에 불과했다. 팀에서도 크게 신경써주지 않는 판에 성격마저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정감독이 “이봉주 저 놈은 평소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는 놈”이라고 말했을까.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 감독의 성격은 불같았다. 선수들은 그를 ‘독사 조련사’라고

부르며 그의 말이라면 꼼짝 못했다. 그는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지 못한 무명 단거리선수

출신이다.53년 한국전쟁 때 군에 입대해 장기하사로 근무하며 육군 원호단(상무

육상팀)감독을 역임했다.87년 코오롱 마라톤팀 창단감독이 된 이래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를 발굴해 2시간12분대에 머물던 한국 마라톤을 2시간7분20초로 끌어올렸다.

그뿐 아니다. 황영조의 바르셀로나올림픽 제패와 히로시마아시아경기 제패, 이봉주의

애틀랜타올림픽 2위, 방콕아시아경기 우승을 빚어냈다.

정 감독은 24시간 내내 마라톤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마라톤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선수들은 자식이나 똑같았다. 단 1분 1초도 선수들과

떨어지지 않았다. 선수들과 늘 숙소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을 잤다. 선수 개개인의

성격 취미 잠버릇에서부터 뭘 잘 먹고 잘 안 먹는 것까지 샅샅이 꿰고 있었다. 선수들

눈빛만 봐도 그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챌 정도였다.

결국 이것이 96년 황영조가 은퇴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 됐다. 훗날 이봉주가

팀을 뛰쳐나오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나이 서른이 됐는데도 일일이 간섭을 받는

것에 이봉주는 숨 막힐 듯 답답했다. 혈기왕성한 선수들과 정 감독의 궁합이 잘 맞지

않은 것이다.

기자들이 간혹 정 감독에게 “감독이 너무 지나치게 다 큰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참견하는 게 아닌가” 하고 물으면 정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라톤이란 남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린다든가 아니면 다른 데 신경 쓰면서 할

수 있는 한가한 운동이 아니다. 하루를 놀고 나면 원래 수준까지 가기 위해 일주일

강훈련을 해야 한다. 나도 다 큰 선수들에게 독종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선수들을 24시간 관리하지 않으면 선수들의 경기력이 뚝

떨어진다. 그래서 난 선수들이 잠자리에 드는 걸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잘

수가 있다.”

감독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선수라도 연습에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마라톤 천재 황영조도 상상을 초월하는 강훈련을 견뎌내야 했다. 황영조는 후에 “훈련

중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그 바퀴 밑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죽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정 감독은 겉으로 말은 안했지만 이봉주의 성실성에 내심 흡족해했다. 평소 기자들과

이야기할 때도 이봉주 칭찬을 많이 했다.

“훈련에 임하는 이봉주를 보면 나는 아주 흡족하다.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불만이 거의 없다. 훈련 자체를 즐거워하는 걸 보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꽃을 피울 것 같다. 또한 코오롱에 입단한 후배 김이용이 함께 훈련을 하니

이봉주도 한결 든든하리라 생각한다.김이용은 지난 96년 동아마라톤에서 건국대학생

신분으로 황영조를 꺾고 3위에 입상한 실력파다.”

하지만 이봉주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는 방황했고 술도 자주 마셨다.

가끔 팀을 이탈해 정 감독으로부터 심한 질책도 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까지 이어졌다.

이때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사람은 현재 그의 동갑내기 아내인 김미순씨였다.

정 감독의 ‘마라톤 지도자론’은 3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굴의 정신력이다. 둘째 교과서대로 지도하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다. 각 선수에게 맞는 훈련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지도자는 선수에게 절대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정 감독이 가장 가슴아파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96년 황영조의 은퇴와 99년

이봉주가 자신의 품을 떠났을 때였다. 자식 같은 선수를 잃는다는 허탈감에 건강도

무척 나빠졌다. 하지만 그 때도 정 감독은 겉으로는 담담했다. “또 키우면 되지

뭐.”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 임진수 김옥빈 등 젊은 선수들을 뽑아 신발 끈을 다시

조였다. 그리고 말했다. “쯧쯧 정말 큰일이야, 아무리 눈 씻고 봐도 황영조나 이봉주

같은 아이들이 안 보여. 어떻게 쏘아올린 한국마라톤인데…. 아시아경기와 올림픽을

제패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세계최고기록이야. 정말 그거 한번 하고 눈을 감고 싶은데….”

감독은 2001년 7월 5일 오랫동안 시달려온 당뇨와 간염으로 눈을 감았다. 기자가

정 감독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해 3월 동아서울국제마라톤에서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현장에 나와서도 온통 한국 마라톤 장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라고 묻자 “글쎄, 마라톤 생각할 때는 아픈 것도 잘 느끼지 못하는데…”라며

맑고 그윽한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정감독이 눈을 감자 황영조는 “선수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지도자생활을 하다

보니 (정)감독님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심정이다.

선수 때는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이 너무 힘들어 도망치기도 하고 반발했지만 그분이야말로

마라톤밖에 모르는 진정한 한국 마라톤의 대부였다”고 말했다.

이봉주는 마침 세계선수권에 참가하기 위해 캐나다 애드먼턴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봉주는 빈소에 들러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해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면목이

없다. 나로 인해 건강이 악화됐다고 들었는데 정말 죄송하다. 정 감독님은 무명인

내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주셨다. 내가 서른이 넘도록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감독님으로부터 배운 마라톤에 대한 끝없는 집념과 열정

때문이다.”

TIP-마라톤 트랙게임 즐기기

육상의 꽃은 마라톤이다. 그렇다면 마라톤의 꽃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트랙게임’이다. 트랙게임이란 마지막 결승선을 앞두고 트랙이 있는 경기장 안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승부’를 말한다. 2명이 거의 동시에 경기장 트랙에 들어온다면?

아니 3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 다툼을 하며 들어선다면? 아마 경기장의 수많은

관중은 그만 숨이 꼴깍! 넘어갈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고,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쳐댈 것이다. 남은 거리는 길어야 300~400m. 시간으로는 길어야 50초

남짓한 짧은 시간.

트랙게임을 벌이는 선수들은 피가 마른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몸은 천근만근 자꾸만 땅속으로 가라앉는다. 오직 정신력으로, 본능적으로

다리를 옮길 뿐이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 앞선 선수는 그대로 결승선에 골인해야 한다. 쫓아가는 선수는

젖 먹던 힘을 다해서라도 앞선 선수를 제쳐야 한다. 하지만 100리가 넘는 먼 길을

달려온 선수에게 한두 걸음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봉주는

이런 트랙게임에서 두 번이나 지고 말았다. 한번은 1996년 경주 동아국제마라톤에서

포르투갈의 스페인 마틴 피스에게 1초 늦은 2위(2시간8분26초)에 들어온 것이다.

거리로는 5~6m 차. 두고두고 땅을 칠 일이다. 그러나 이봉주의 트랙게임 징크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곧 이어 열린 96애틀랜타올림픽에서 또 3초차로 2위(2시간12분39초)에

머문 것이다. 1위는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 거리로는 15~18m 정도. 올림픽 남자마라톤

사상 가장 짧은 시간차다.

“경기장에 들어서기까지 50여m 떨어졌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조금씩 좁혀가고

있었다. 투과니와 한 15m 정도 떨어져서 잘 하면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결승선이 보였다. 결승선이 조금만 더 뒤에 있었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너무 원통하고 억울했다.”      

이봉주가 트랙경기에서 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긴 적도 두 번이나 된다. 한번은

95년 3월 경주에서 열린 동아국제마라톤. 당시 이봉주는 스물다섯의 한창 때였다.

8개국에서 95명이 참가했지만 30km가 지나자 이봉주-네루카(영국)-에스피노자(멕시코,

94년 세계랭킹 2위)-마티아스(포르투갈) 등 4명으로 좁혀졌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이제나 저제나 마지막 스퍼트 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38km 지점에서

이봉주가 맨 먼저 뛰쳐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3명의 선수들도 안간힘을 다하며 바로

뒤를 따라 붙었다. 코스는 서서히 오르막에 접어들어 결국 지구력이 누가 더 강하느냐의

싸움이었다. 경주 북군동에서 한화 콘도에 이르는 고개에서 에스피노자와 마티아스가

떨어져 나갔다.

영국의 대학생 마라토너 네루카는 힘이 좋았다. 씩씩대며 이봉주 뒤를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당시 결승선은 유감스럽게도 경주현대호텔 정문 앞. 트랙은 없었지만

트랙 경주나 마찬가지였다. 길가엔 수많은 경주시민들이 손에 땀을 쥐며 “이봉주

파이팅”을 외쳤다. 이봉주는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진드기같이

따라붙던 네루카도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봉주가 네루카를 약 27m

앞서 5초차 우승(2시간10분58초). 이봉주의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봉주의 두 번째 트랙게임 승리는 2007서울국제마라톤. 결승선을 1.575km를 앞둔

40.62km지점. 한때 30여m까지 떨어졌던 이봉주가 어느새 케냐 키루이(27)와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갑자기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길가 시민들은 처음엔 설마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원 세상에!”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목이 터져라 응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봉주는 2시간8분04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맨 먼저 통과했다. 약

137m 뒤에 처진 키루이는 25초 늦은 2시간8분29초의 기록으로 2위로 골인했다.

트랙게임은 엘리트선수들만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인 마스터스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엘리트선수들의 트랙게임은 피를 말리는 처절한 경주다.

하지만 마스터스는 그런 절박함이 필요 없다. 그저 트랙에 들어섰을 때 ‘앞선 주자를

하나둘씩 제치기’만 하면 된다. 보통 마스터스의 경우 경기장 트랙에 들어서면 자신보다

앞서 달리는 주자가 많다. 이들은 거의 자신과 기록이 비슷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앞서갈 수 있다. 내심 즐긴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승부를 벌여봄 직한 것이다.

60대 서브스리마스터스 윤용운씨는 마지막 트랙 승부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7년 경력에 15번 넘게 풀코스 완주. 2004년과 2005년 트랙승부로 서브스리를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다. 2004년 2시간59분51초, 2005년 4초 앞당긴 2시간59분47초.

“마라톤은 과학이다. 난 마지막 1km에 승부를 건다. 그 전까진 오버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다. 트랙에 들어서면 내 모든 힘을 다 쏟아 붓는다. 머리속은 텅 비고,

가슴은 숨이 끊어질 듯 아프지만, 몰입하는 그 순간이 너무너무 짜릿하다. 보통 트랙에서

7, 8명을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해 달린 것에 대한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나를 추월하는 마스터스도 반드시 1, 2명은 있다. 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대단하다, 경이롭다’는 생각을 갖는다. 가끔 결승선에 들어와서

힘이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나 자신에게 마구 화를 낸다. ‘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을 쏟지 못했는가’ ‘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쓰러질 정도로 달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자책인 것이다.”     

트랙게임을 벌이는 선수들은 모두가 승자다. 누가 이기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들은

42.195km의 105리 길을 마지막 땀 한방울까지 쏟아 부으며 달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마른 수건에서 또 물을 짜내려하고 있는 것이다.

새 중에서 쉬지 않고 가장 멀리 날아가는 것은 ‘큰 됫부리 도요’다. 이 새는

1만km가 넘는 거리를 2000m 상공에서 평균시속 56km로 쉬지 않고 6~7일을 날아간다.

뉴질랜드에서 황해를 거쳐 알래스카로 이동하는 것이다. 몸길이 41cm 몸무게 250g.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지방과 근육 속의 에너지가 모두 바닥나 뼈와 가죽만 남는다.

금강하구에 막 도착한 어느 도요는 날갯죽지를 축 늘어뜨린 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다.

42.195km를 달려온 마라토너도 도요와 닮았다. 한번 완주하고 나면 몸무게가 3~4kg이

빠진다. 얼굴은 쪼글쪼글하고 뼈와 가죽만 남는다. 뼈와 가죽만 남은 그 몸으로 마지막

승부를 벌이다니! 마라톤 트랙게임은 ‘영혼의 게임’이다.

    코메디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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