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

●이재태의 종 이야기

프랑스의 판매자로부터 조금은 짙은 피부에 별이 새겨진 머리띠의 한 사내를 손잡이로 만든 15cm 크기의 황동종을 구하였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고, 말을 탄 병사가 무장한 코끼리와 함께 싸우는 전투장면이 조각된 것으로 보아 한니발이 아닐까? 외국의 전문가들에게 사진을 보내어 의견을 구해보았으나 모두들 처음 보는 것이라고 답을 하였다. 그들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주제로 한 19세기 프랑스 황동종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로마시대에 제작된 한니발의 조각상과 황동종의 사내의 모습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한니발 조각상은 로만 로브라는 헐렁한 로마 시대의 복장 차림이고 수염을 짧게 깎았다. 청동종 손잡이에 조각된 사내는 짙은 피부 빛과 긴 수염이다.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두고 이태리 시칠리와 마주한 지금의 북아프리카 튜니지아에 해당된다. 대리석상의 로마인보다는 일견 짙은 피부의 아랍인으로 보이는 이 종의 사내가 더 사실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띠의 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슬람에서는 중세부터 초승달과 별을 그들 문화의 표상이었고, 몇몇 국가의 국기에도 초승달과 별이 있다. 이 종이 만들어지던 19세기 당시의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들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5각형 별은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인 알라가 유일신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인 ‘샤하다’,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하루 다섯 번씩 알라에 기도하는 ‘살라트’, 자산의 일부분을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자카트’, 라마단 한 달에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단식하고 성행위를 금하는 ‘사움’과 일생에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하는 ‘하즈’를 상징한다. 이슬람국가인 튜니지아는 한니발장군을 국가의 영웅으로 존경하며, 그들의 지폐에 로마 조각상의 한니발 얼굴을 넣었다.

(한니발이 묘사된 19세기 프랑스 황동종과 튜니지아의 5 디나르 지폐와 국기)

한니발 장군이라 불리어지는 한니발 바르카(기원전 247~183년?)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 북쪽 연안에 건설한 나라 카르타고의 장군이다. 한(hann)은 ‘은총’, 바알(baal)은 ‘주인(lord)’ 또는 ’바알(Baal)신’을 의미하니, 한니발은 페니키아어로 ‘바알 신의 은총’이라는 뜻이다. 바알은 카르타고를 비롯한 고대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 그리고 폭풍우의 신으로 숭배하던 남성 신이었다. 페니키아어는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아직도 서구에는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그 악당도 한니발이었다.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적국이었던 카르타고는 130년에 걸쳐 세 차례의 포에니(라틴어로 페니키아)전쟁을 치뤘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상륙하자, 시칠리아의 로마와 시라쿠사가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를 물리친 전쟁이다. 로마는 해상강국 카르타고를 물리치기 위하여,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하였고 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잃고,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으므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졌다. 이어진 한니발에 의한 로마정벌부터 자마전투의 패배까지의 과정을 제 2차 포에니전쟁이라 한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이후 카르타고가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 왕국을 공격하자, 로마가 출정하여 카르타고를 격파하며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게 대패한 바 있는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다. 한니발은 이후 스페인에 주둔한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청년 시절에 식민지 스페인의 총독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인 BC 218년(29세)에는 복수를 위한 로마 출정에 나섰다. 보병 4만, 기병 8천명에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로마는 즉시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마르세이유)로 나누어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를 가로질러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다. 로마의 상식을 뛰어넘는 과감한 전법이었다. 후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었을 때는 여름철이었으나, 한니발은 무려 2000년 전에 겨울 알프스를 넘은 것이다. 험준한 행군으로 반 이상의 병력이 죽거나 도망쳐서 병력은 보병 2만여명, 기병 6천명 정도만 남았다. 그 또한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으나, 남은 병사들을 추스리며 88만 병사의 로마군과 싸우며 이탈리아로 나아갔다.

한니발은 칸나이를 비롯한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궤멸시켰다. 칸나이 전투는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왼쪽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승리함으로서 전범에 기록된 유명한 전투였다. 카르타고 군은 6천명 전사하였으나 로마군을 7만명 죽이고 1만명은 포로로 잡혔다. 한니발은 심리전에도 능하였다. 그는 포로로 잡은 로마 연합군 중에서 로마군은 혹독하게 대하였으나 로마의 동맹국 병사에게는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고, 바로 풀어주었다. 로마 동맹국의 전열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의 바로 앞까지 진출하였으나 바로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주변의 도시를 공격한다. 동맹국으로 부터 로마를 분리하여 로마를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으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맹렬하게 돌진하던 한니발을 막았던 것은 평민 출신의 샘프로니우스였다. 로마군은 한니발이 점령한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한니발은 한쪽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돌파하려 하였으나 로마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였다. 그는 포위를 풀고자 마침내 로마를 직접 공격하였으나 끝까지 로마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좌)과 칸나에 전투(우) 상상도 출처 wikipedia)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되지 못한 카르타고 군이 충분한 보급을 받지 못한 가운데, 로마가 지연전을 펼치자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로마 동맹세력들도 한니발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로마의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과의 전투를 피하여 도망다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군대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지구전을 펼쳤다. 국민들에게 비웃음과 큰 비난을 받았으나,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카르타고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으므로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이미 비옥한 북아프리카를 차지하고 있던 카르타고도 더 이상 한니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편, 로마는 지연전과 함께 당시의 전쟁의 개념을 바꾸는 혁신적인 전략을 펼친다. 젊은 장군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이탈리아에 한니발 군대를 묶어 두고, 스페인의 카르타고 군 본거지를 친 것이다. 스키피오는 아버지를 따라 17세부터 전쟁에 참여하였던 로마의 귀족이었다. 그는 한니발이 승리한 네 번의 큰 전투 중에서 세 번을 참여하였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었다. 절치부심하며 준비를 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두 동생들이 지휘하던 카르타고군을 격파하고 스페인에서 몰아냈다. 동생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의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은 병력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진입하였으나, 대기하고 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자신도 사망하였다. 전황이 로마에 유리해지자 한니발의 편이던 남부의 도시들도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으로 돌아선다. 한니발은 시칠리아도 빼앗겼고, 반도 끝인 칼라브리아로 밀려났다.

결국 15년 동안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한니발 부대는 BC 203년 카르타고로 철수하고,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스키피오 부대와 운명의 일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한니발의 전략을 잘 숙지하였던 젊은 스키피오는 자마에서 한니발에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다. 5만명의 카르타고 군(보병 4만 6천, 기병이 4천, 전투 코끼리 80마리)은 기병대 6천명을 포함한 4만의 로마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것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코끼리들이 돌격할 때 전열에 선 병사들에게 나팔을 힘껏 불도록 명령하였다. 나팔소리가 울리자 놀란 코끼리 몇 마리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한니발의 기병과 충돌하였다. 나머지 코끼리들은 스키피오가 고의로 길을 열어두었던 반원의 통로로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일단 표적 안으로 들어오자 로마군은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다. 놀란 코끼리들은 카르타고 기병 쪽을 향해 몰려갔다. 코끼리들이 적을 공격하기 보다는 오히려 양 날개 쪽에 배치된 한니발의 기병을 흩어 버렸다. 이 혼란한 틈을 타고 로마 기병이 한니발의 기병을 기습하였고, 누미디아 기병이 합류한 정예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의 보병의 배후를 공격한다. 패전을 모르던 카르타고군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며 몰살을 당하였다. 카르타고군 4만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나, 로마군은 1500-4000명 정도만 희생되었다.

자마 전투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다. 한니발의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의 포기, 거액의 전쟁 배상금, 카르타고 해군의 해체라는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받아들였고, 로마는 지중해 서부의 지배권을 차지하였다.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동생 하스드루발과 마고가 이 전쟁에서 죽었다. 한니발은 자마전투에서 패전한 후,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이후 시리아군으로 로마와 싸우기도 했으나, 로마의 추격을 피해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의 사자가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 1세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요청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니발은 도망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BC 183-2년경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 사상 최강의 적장이었고,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는 ‘위험이 닥쳤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후일 로마인들은 한니발을 경외하여 그의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좌)와 자마전투 상상도, 1567년 제작 (우), wikipedia

기록에는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두 차례 만난 것으로 되어있다. 첫 만남은 카르타고의 자마에서 격돌하기 직전의 협상장이었다. 한니발의 노련함과 스키피오는 패기는 서로를 설득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투에 돌입한 것이다. 이후 소아시아 에베소에 망명하고 있던 한니발은 시리아의 전쟁 중 다시 로마의 스키피오를 만났다.

이때 스키피오가 12세 연상인 한니발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인가요?” 한니발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라고 대답하였다.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요?” “그건 물론 나요.” 그러자 전투의 승리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을 받았던 스키피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장군이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 그 답은 어떻게 될 것이요?” 한니발은 “그렇다면 내가 첫 번째 장군이 되었을 것이요.”

(2차 포에니전쟁의 경로. http://cfile215.uf.daum.net/image/251749355215FE0A2E2992)

스키피오는 자마의 승리로 최고의 명예를 얻으며 로마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원로원은 이 젊은 전쟁영웅을 질시하였다. 많은 정적들이 나서서 그를 뇌물죄로 고발하였고, 점차 로마의 권력층에서 멀어졌다. 결국 치욕스럽게 은퇴를 하여야했고 52세(BC 183년)로 짧은 생을 마쳤다. 한 맺힌 그의 유언은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이었다. 그의 몰락은 후세의 로마 정치인에게 교훈이 되었는데, 원정 전투에서 귀환하던 마리우스, 술라와 카이사르는 그들의 충성스런 군단을 앞세웠고, 그들은 무사히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리위우스의 「로마사」에서 한니발은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강대국이라도, 오랜 시간 평화가 계속될 수 없다. 외국에 적이 없어도 국내에 적이 생긴다. 외부의 적을 불허하는 튼튼한 자신의 육체도 신체 내부의 질환으로 고통받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세상에 좋은 것(the good)의 적은 더 좋은 것(the better)이라고 하였다. 강함을 이기는 것은 더 강함이다. 2000년전 로마를 위협하였던 전쟁의 신은 더 총명하였던 젊은 스키피오에 굴복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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