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에게도 혼돈-증오 야기… 세상을 바꾼 과일

이재태의 종 이야기(52)

인류의 염원이 담겨진 과일 “사과”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과일은 무엇일까? 인류 역사에 가장 의미있는 변화를 준 과일은 사과라고 한다. 사람들은 즐겨먹는 과일인 사과에 그들이 이룰 수 없었던 열정과 소망을 담았다. 작은 사과 한 알에는 신화, 종교, 과학, 문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의 아름다움, 죄, 구원, 힘, 지식과 과학에 관한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원산지가 발칸반도인 사과나무는 동쪽으로는 중국서부와 시베리아를 건너 우리나라까지 분포하게 되었고, 서쪽은 남동부 유럽의 코카서스, 터키 등으로 퍼져나갔다. 사과는 오래 전부터 재배되었데, 약 4000년 전의 스위스의 동굴 거주지에서 탄화 사과가 발굴된 바가 있다. 그리스 시대에는 사과의 접목법이 기록되어있다고 하며, 로마시대에는 사과 재배가 성행하였다. 유럽의 사과는 16~7세기에 전체 유럽 지역과 북미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남미로 전파되어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서 사과가 재배되었다.

필자가 자랐던 대구 인근지역은 한때 사과 산지로 유명했었다. 우리는 사과보다는 능금이라고 불렀고, “대구 능금”은 대구를 대표하는 ‘과일 브랜드’였다. 대구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비타민 C가 풍부한 능금을 즐겨먹어서 미인들이 많고, 역대 미스 코리아는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고 했다. 기록을 찾아보니, 해방이후 한동안은 능금이라 많이 불리어졌으나, 점차 사과라는 단어로 대치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 세대는 능금은 경상도 사투리이고 사과는 표준말로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사과’와 ‘능금’은 지역에 따라 표현을 달리한 것이 아니다. 사과와 능금은 학명(學名)이 ‘Malus pumila Miller’와 ‘Malus asiatica Nakai’로 서로 다른 과일이다. 우리 역사 속의 능금은 지금의 사과와는 다른 야생종 능금이나 재래종 사과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능금은 삼국시대에도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며, 고려 때에 서적인 ‘계림유사(1103)’에는 ‘임금(林檎)’으로 처음 기술되었다. 한자 ‘능금나무 금(檎)’은 ‘새(禽)’과 ‘나무(木)’가 붙은 글자인데, 향기가 좋아 숲(林) 속의 새(禽)들이 찾아와서 먹는 과일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임금’은 점차 발음이 쉬운 ‘능금’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사과는 조선 인조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이후, 18세기 초에서야 비로소 재배가 가능해졌다. 이후, 1890년 캐나다 및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과수원이 개원되었고 1900년대 초에는 일본인들이 농업이민으로 들어와서 축, 홍옥, 욱등의 품종을 재배하였다. 사과(沙果)는 ‘모래(沙)밭처럼 물이 잘 빠지는 땅에서 자라는 과(果)일’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과나무는 겨울에 삼한사온이 뚜렷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에 잘 자라므로, 대구 지역이 사과 재배에 가장 적당하였기에 많이 재배된 것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한반도의 기후도 변하여, 사과 생산지도 점차 북쪽으로 올라갔고 “대구 능금”의 명성도 사라져 간다.

사과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부족함으로 인한 한계라는 서로 배치되는 두 관념이 함께 들어있다. 그 시대에는 극복되기 어려웠던 인간의 한계와 결핍을 넘어서려는 궁극적인 욕망을 함께 담아 준 것이다. 사과는 신화나 옛 이야기에서 불화를 야기하는 과일로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는 사과의 모양과 맛이 모든 과일 중의 으뜸이었기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과는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태초의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에 거역하며 따먹음으로서 하느님의 낙원에서 추방되게 한 금단의 과실로 처음 등장하였다. 에덴의 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한다. 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지혜로워진다고 유혹하자 이브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권한다. 결국 두 사람은 풍요로운 낙원에서 쫓겨난다. 선악과를 먹은 두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되어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한다. 이브는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고, 아담은 힘든 노동을 하며 생명을 부지하게 되나, 그 생명은 유한하다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사실, 성서에 나오는 선악과가 “사과”라는 증거는 없으나, 모두 사과라고 하는 것이다. 사과는 인간 원죄설의 근본이 되었고, 사과로 인하여 새로운 인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원죄의 사과’는 기독교 사상을 형성해 온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신의 명령에 따라 살던 인간이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시행한 최초의 행동으로 기록된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로서 독립된 자아를 가진 인간, 지혜로운 인간이 지구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의 사과’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들의 소유물로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과일이었다. 제우스와 헤라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선물한 것이다. 헤라는 세계의 서쪽 끝에 있는 정원에 이 사과나무를 심고 아틀라스의 세 딸들인 헤스페리데스와 100개의 머리를 가진 잠들지 않는 용(龍) 라돈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나무의 가지와 잎이 황금이고, 황금사과가 열렸다. 그 광채는 서쪽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리스 신화에는 헤라가 내린 광기(狂氣)로 미쳐버린 헤라클레스가 자기의 세 아들을 죽인 이야기가 있다. 정신을 차린 헤라클레스는 테베를 떠나 델포이로 갔고, 그곳에서 아들을 죽인 죄 값을 치르기 위해 티륜스의 영주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로 들어가서 10개의 어려운 노역(勞役)을 완수하라는 신탁(神託)을 받게 된다. 그가 모든 노역을 성공하면 죄를 씻을 수 있고,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10개의 노역을 모두 성공했으나, 그 중 두 임무는 수행과정 중에 하자가 있었기에 8개만 완수한 것으로 판정받았다. 그에게는 2개의 추가적인 노역이 주어졌고, 11번째 노역은 헤스페리데스에 열린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평생 하늘을 떠받치는 벌을 받고 있던 아틀라스를 찾아가서 천구(天球)을 대신 짊어져 주는 등의 노력으로 그를 속였고, 라돈과 싸워가며 마침내 황금사과를 얻어온다. 헤라클레스는 사과를 가져온 다음 12번째 과업도 완수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노역을 끝낼 수 있었고, 결국 신의 반열에 오른다. 고대 미술품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가 들고 있는 사과는 불멸을 염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파리스의 사과’도 소개되었다. 불화의 신 에리스는 퓌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리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였다. 화가 난 테티스는 결혼식장에 나타나 하객들 사이로 황금사과를 던졌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여 있었는데, 각자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여신들은 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결혼식장은 혼란스러워졌다. 그중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지혜의 여신 아테나, 세 여신이 정식으로 다툼의 장에 나섰다. 곤란해진 제우스는 떠돌이 양치기소년이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판정하는 심판을 맡기고 피하게 된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 브리아모스의 아들이었다. 장차 나라에 큰 재앙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신탁(神託)때문에 왕은 파리스가 태어나자마자 이데의 깊은 산으로 보내두었던 것이다. 파리스는 권력이나 지혜를 주겠다는 헤라와 아테나 대신,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선정하고, 황금사과를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뽑아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파리스의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 미녀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였는데, 미美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파리스가 헬레네와 결혼하도록 돕는다. 파리스가 그리스의 젊은 영웅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리고 옴으로써 유명한 트로이전쟁으로 이어진다. 미인 경연에서 분노한 헤라와 아테나는 그리스를 도왔고,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트로이는 결국 멸망한다. 한 개의 사과가 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파리스의 사과’는 ‘비너스의 사과’라고도 불리며,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을 의미하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는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매혹적인 주제는 많은 미술작품으로 그려졌다. 루벤스는 사과를 든 파리스와 헤르메스 앞에 세 여신이 나체로 서서 심판을 기다리는 장면을 그렸다. 세 여신은 각기 다른 포즈로 풍만한 육체를 뽐내면서 파리스의 손에 있는 사과를 갈구하고 있다. 결국 ‘선악과’라는 사과와 그리스 신화의 ‘황금 사과’는 인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도 혼돈과 증오를 야기한 단초가 되었다. 그 사과에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쟁취하고 싶은 아름다움, 사랑, 불멸과 같은 인간이 근원적인 욕망이 담겨있고, 그와 함께 탐욕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이후 사과에게는 슬프고 세상을 불신케 하는 현실에서 세상을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독일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주인공이 삶과 죽음 사이를 왕복하며 결국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내용인데, 사과가 세상의 정의를 실현되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1804년에 발표된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영어는 윌리엄 텔)‘에 나오는 사과도 유사한 개념이다.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14세기의 일이었다. 총독 게슬러는 높은 장대에 모자를 걸어 놓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들 발터와 함께 그곳을 지나가던 빌헬름 텔은 모자에 인사를 하지 않았다가, 체포되었다. 총독은 명사수로 알려진 그에게 ’50미터 떨어진 벽에 아들을 세워 놓고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화살로 맞힌다면 죄를 용서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투옥시키겠다‘고 하였다. 사과를 맞히지 못한다면 자신의 화살로 아들을 죽이게 되는 위기에서, 빌헬름의 화살은 머리 위에 얹힌 사과를 정확하게 맞춘다.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기뻐했다. 그러자, 못마땅한 총독은 화살 통에서 꺼낸 두 번째 화살의 용도를 묻는다. 그러자 빌헬름은 “만약 적중하지 못하였다면 당신을 쏘려고 했소”라고 대답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다. 빌헬름은 배로 압송되는 도중 폭풍우 속에서 탈출에 성공하고, 마침내 게슬러를 쏘아 죽이고 봉기를 이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영주들의 폭정에 억눌려 지내던 스위스 농부들이 호응하였고, 마침내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물리치고 독립하게 되었다. 빌헬름은 가상의 인물이나, 이 이야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약소국 스위스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가 맞추어야 했던 아들의 머리 위의 사과는 전설이 되어 전해졌으며, 사과는 혁명과 자유를 기원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뉴턴의 사과는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과학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해 준 혁신적인 사과이다. 1665년 경 유럽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케임브리지 대학도 1년 반의 긴 휴교에 들어갔고, 뉴턴은 작은 고향 마을인 울즈소프로 귀가하였다. 어느 날 정원의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우연히 보고, 지구와 사과 사이에 어떠한 힘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는 “그것은 내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사과 하나가 떨어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왜 저 사과는 옆이나 위로는 향하지 않고 항상 아래를 향해 낙하하는 것일까? 항상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으니, 아마 지구가 그것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지구에는 물질을 끌어당기는 힘(인력, 引力)이 있는 것이다.”라고 유추한 것이다. 즉, 관찰한 떨어지는 사과에서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에 생각했고, 모든 물체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이 존재함을 발견한 것이다. 뉴턴 이전의 사람들은 세상은 하늘과 땅이라는 두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당시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를 떨어뜨린 후 낙하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었고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두 과학자가 발견한 지상 운동과 하늘에서의 행성의 운동은 서로 다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뉴턴의 사과는 이 두 운동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구 주위를 도는 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는 똑같은 운동을 하고 있고, 땅과 하늘의 세계는 하나의 법칙이 작용하는 서로 다르지 않은 세계임을 밝힌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여 그 근원적인 원리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근대의 사가(史家)들은 아담과 이브의 사과, 파리스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를 ‘세상을 변화시킨 4개의 사과‘라고 한다. 그중 ’아담과 이브의 사과‘와 ’파리스의 사과‘는 유혹에 빠져 자기중심을 상실하면 퇴보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빌헬름 텔과 뉴턴의 사과는 부단한 노력과 열정으로 새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새 천년이 시작된 21세기에는 ‘애플(Apple)’이라는 또 다른 사과가 세상의 구조와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를 이끌고 있다. 마침내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가 주도한 이 ‘애플’을 추가하여 ‘세상을 변화시킨 다섯 개의 사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76년 스티브 잡스,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이 설립한 애플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인 매킨토시를 소개하며 등장하였다. 2007년 ‘애플(Apple)사’로 개명한 이들은 기술혁신으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차례로 성공시키며, 전 세계인의 손에 스마트 폰을 쥐어주며 개인 정보화라는 새 패러다임을 열었다. 사과를 즐겨먹고 사과나무를 좋아했던 이들은 애플을 회사명으로 사용하였다. 초창기의 ‘애플사’ 로고는 ‘나무 아래에 앉아 중력을 생각하는 뉴튼’의 그림이었으나, 곧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로 바뀌었다. 한 입 깨문(bite)이라는 단어가 정보처리 단위인 바이트(byte)와 발음이 비슷하여 정했다는 설명과, 컴퓨터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비운의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였던 튜링은 동성애자였는데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다가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한입 깨물어 먹음으로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인 이념이 담긴 로고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 잡스 사후에 애플을 이끌고 있는 팀 쿡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노년에 사과나무를 심자 사람들이 답답하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 사과나무를 심어서 언제 따 먹겠습니까?”. 스피노자는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수확하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후손들이 따 먹을 수 있도록, 느긋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과에는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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