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혼, 참수…파란만장 헨리8세 여인들

이재태의 종 이야기(49)

메리 1세 &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고등학교 시절, 리차드 버튼과 주느뷰 뷔졸드가 주연한 영화 ‘천일의 앤’을 흑백 TV로 처음 보았다. 영화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린이 왕과 결혼하여 후일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를 출산하나, 결국은 왕의 미움을 받아 1536년 간통의 죄명으로 처형되기까지의 1000일 가량의 시간을 다루었다. 왕이 앤 볼린을 처형하기위해 재상 크롬웰이 가져온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자신이 앤과 결혼하기 위하여 안달하던 모습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에는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관계를 알아야만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컬러 TV로 이 영화를 다시 보며, 6명이나 되는 헨리 8세의 부인들과 자식들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헨리 8세는 군사력의 증강에 힘써서 웨일즈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에 병합하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강력한 군주였다. 특히 영국 성공회를 만들어 종교개혁의 주역이 되었다. 1남 2녀 자식들은 모두가 헨리 8세 사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대영제국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헨리는 공식적으로 모두 여섯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그 중 두 번째와 다섯 번째 부인인 앤 볼린과 케서린 하워드를 간통과 모반의 죄로 처형하고 세 명의 왕비와는 이혼한 비정한 남성이었다. 네 번째 왕비인 독일 클레베스 공작의 딸 앤은 영국 왕실의 궁정화가가 독일로 가서 그려 보냈던 아름다운 모습의 초상화를 보고 결혼한 경우였는데, 왕은 그녀의 실제 모습에 실망하여 이혼을 하였다. 그 결혼을 주선하였던 신하인 토마스 크롬웰는 책임을 추궁당하여 처형되었다. 헨리 8세 시대의 다양하고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이후 문학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 것이다.

헨리 7세의 큰 아들인 아서가 젊어서 사망하자, 잉글랜드와 에스파니아 두 왕실은 정략적으로 아서의 동생인 헨리를 형수 캐서린과 결혼시켰고, 그가 헨리 8세로 즉위한 것이다. 캐서린은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에스파니아)의 공동 통치자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딸이었는데, 영국에서 혼례도 치르기 전에 아서가 사망한 것이다. 헨리와 캐서린 부부는 다섯 자녀를 낳았지만, 딸 메리 외에는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왕은 왕위를 이을 아들의 출산을 원하였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두 사람의 사이는 파탄에 이른다. 헨리는 케서린과의 이혼을 원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이 승인을 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가톨릭과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 성공회를 만들고 스스로 수장이 되어 이혼하였다. 캐서린 왕비는 이후 가톨릭에 의지하여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다. 캐서린의 딸 메리는 한때 헨리 8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두 번째 왕비가 된 앤 볼린에 의하여 왕의 사생아로 신분이 격하 되었다. 메리는 이복동생이자 앤 왕비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봉사하며 살기도 했는데, 헨리 8세의 6번째 부인인 케서린 파에 의해서 겨우 공주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앤 볼린은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서 3년간 지내다가 귀국한 예절바르고 매력적인 처녀였다. 헨리 8세는 무도회에서 처음 본 15세의 앤의 상큼함에 반하여 계속 구애를 한다. 그러나 앤이 냉담하자 왕은 그녀를 캐서린 왕비의 시종으로 궁정으로 불러들이고, 지속적으로 청혼을 하였다. 궁정에서 권력의 재미를 느끼게 된 앤은 왕에게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대신 자신에게는 잉글랜드 왕비의 신분이 주어져야 하며,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결혼조건으로 관철시켰다. 헨리 8세는 끝까지 이혼을 반대하던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무어를 처형하고 교황청을 무시하며 결국 이혼 후 앤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공주를 출산하여 왕자를 바라는 왕을 실망시켰다. 또한 엘리자베스 공주의 왕위계승권과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헨리 8세는 앤과의 이혼을 결심한다. 앤은 신하와 간통하였다는 죄명으로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크롬웰이 주재한 재판에서 간통죄에 대한 무죄가 판결되었으나, 그녀는 이혼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이미 앤 볼린의 시종인 제인 시무어를 사랑하고 있던 왕이 앤의 참수형을 명령한 것이다. 앤이 처형되자 딸 엘리자베스도 언니 메리처럼 사생아로 격하되었고, 생명을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3번째 왕비가 된 제인 시무어가 마침내 에드워드를 출산하나, 제인은 출산 후 산욕증으로 바로 사망한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10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였으나, 병약한 그는 불과 16세에 사망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권력자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왕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는 그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공작을 꾸몄다. 자기 아들인 길드포드를 에드워드 6세의 오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키고, 병석의 왕을 설득해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승계한다는 유언을 남기게 했다. 제인은 갑작스럽게 여왕에 즉위하였는데, 성공회를 후원하던 에드워드가 가톨릭인 누이 메리를 싫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메리는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지방으로 도망을 가야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제인보다는 왕의 누나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오랫동안 불행한 시기를 보내야했던 메리를 동정하였다. 마침내 존 더들리의 권력욕에 분노한 귀족과 민중들이 봉기하였고, 메리를 옹립하여 런던으로 입성하였다. 메리는 메리 1세로 즉위했고, 16세에 불과했던 제인 그레이는 단 9일 만에 폐위되고 더들리공작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제인은 본인의 의사보다는 더들리 공작과 부모인 그레이 후작 부부의 욕망으로 여왕에 옹립되었지만, 살려두면 계속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신교 세력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메리 1세는 가톨릭으로 끝까지 개종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제인은 이를 거부하며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복종하여 무사하였다.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교도였던 메리 1세는 전임 왕들의 신교 정책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였다. 많은 신교도들이 탄압을 피해 국외로 탈출했고, 300명에 달하는 성공회 주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가톨릭 국가 에스파니아를 지지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인 에스파니아의 왕자 필리페와 결혼하였다. 필리페는 38세였던 메리보다 11살이 적었고, 메리는 필리페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으나 출산하지 못하였다. 필리페는 영국에서 1년을 보내고 에스파니아로 돌아가서 필리페 2세 왕이 된다. 이 결혼으로 잉글랜드는 에스파니아와 프랑스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유럽 대륙에 있던 유일한 자국 영토인 칼레를 잃어 국민들에게도 큰 실망을 주었다. 그녀는 5년 남짓 왕으로 재위하였고, 1558년 죽기 전날이 되어서야 앙금이 있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왕위 이양을 선언하였다.

그녀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끔찍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공포정치와 신교도와 성공회 신부들을 잔인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자 국민들은 새 여왕인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환영하고, 메리의 사망일을 이후 200년 동안이나 ‘압정에서 해방된 날’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신교도인 후대의 왕들이 가톨릭인 그녀를 폄하하기 위한 모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25세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언니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앤 볼린이 처형된 후, 서자의 신분으로 한 때는 왕비의 시종으로 지내기도 했다. 메리 1세 때에 일어난 반란에서 체포된 주동자가 고문 끝에 엘리자베스가 반란에 연관되었다고 허위 자백을 하는 바람에 런던탑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왔던 엘리자베스는 의회가 여왕의 등극을 승인하자 “위대하신 신의 조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처녀여왕’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형부였던 필리페 2세를 비롯한 많은 외국 왕가의 청혼에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고 거절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한 후 가톨릭, 교회, 외국으로부터의 영국의 독립을 표명하며, 강한 국가의 절대왕권을 마련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간섭하며 프랑스에서 자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스코틀랜드의 왕에서 폐위된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하였으나, 20년간 감금당하다가 결국은 처형당한 것이다. 가톨릭인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한 것은 주변 국가들의 분노를 샀다. 에스파니아의 펠리페 2세는 이 사건을 기화로 ‘무적함대’를 영국으로 출전시켰으나, 폭풍우와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멸되었다. 엘리자베스는 45년간 재위하며 능숙한 외교술에 강력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영국을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영국 국민들은 지금도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라고 부르며 그녀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녀는 사망하며,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헨리 8세와 그의 왕비 아라곤의 케서린과 앤 볼린, 제인 시무어…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및 엘리자베스 1세, 9일 동안 여왕이었던 제인 그레이.. 한 시대를 지배했거나 비련의 삶을 산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서 영국민들이 ‘종’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딸랑딸랑 소리를 듣고 싶어한 인물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권력의 여부를 떠나서, 두 사람 모두는 꿋꿋하게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냈고, 미련없이 자기가 가야할 길로 전진한 사람이었다. 국민들은 강하면서도 온화한 사람들을 가까이에 두고 오래오래 기억하고자 한 것 같다.

영국에서 헨리 8세가 활동한 16세기는 조선은 중종과 인종,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전란에 휩쓸린 선조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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