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눈의 괴물’에 갈갈이 찢어진 사랑

 

배정원의 Sex in Art(27)

테오도르 샤세리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살려 둔다면 계속 다른 남자도 농락할 테지, 촛불을 끄고 그 다음엔 목숨의 불도 끄는 거야…”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슬람교도) 남자는 잠자는 여자 곁으로 몰래 다가가 무서운 음모를 꾸미는 듯 보인다. 자신에게 곧 불어 닥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예지몽이라도 꾸는지 여자의 잠도 어수선한 듯 몸이 반쯤 침대에서 흘러내린 불안한 자세이다. 음험한 눈빛의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것은 모래가 가득 찬 부대자루로, 남자는 곧 여자의 얼굴을 눌러 압사시킬 작정이다.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색의 잠옷은 그녀가 순결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을 암시한다.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잠에 취한 아름다운 그녀를 살해하도록 하는가?

이 그림은 그렇다,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른 질투에 휩싸인 남편 오셀로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결한 아내 데스데모나의 이야기이다. 그림을 그린 테오도르 샤세리오(1819~1856)는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 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약한 고전파 화가이다. 고전파의 대가 J.A.D.앵그르에 사사했으나, 들라쿠르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승 앵그르에게는 선의 아름다움을, 들라쿠르아에게서는 따뜻하고 낭만적인 색채를 융합하여 자신의 화폭에 담았다. 샤세리오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그렸다.

특히 이 그림에서 샤세리오는 퓌슬리의 『악몽』의 구도를 빌려와 더욱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의처증 남편의 대표주자로 이름을 알린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오셀로』의 주인공인 무어인 장군이다. 원래 이 작품은 1566년 이탈리아 사람인 제랄디 친디오가 쓴 『백 개의 이야기』 제3권 제7화에 나오는 『베니스의 무어인』에서 소재를 얻어 왔다고 한다. 오셀로는 솔직하고 관대하며 타인의 말을 잘 믿고 지나치게 신뢰하는, 고결한 심성의 사람으로, 단순하고 낭만적이며 용감한 장군이다.

그는 브라반시오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져 비밀리에 결혼하는데, 그의 부하 이아고는 자신대신 카시오를 승진시킨 오셀로에게 앙심을 품는다. 악인의 대명사라 할 이아고는 계략의 천재라,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오셀로를 속이고, 이에 분노한 오셀로는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여 목 졸라 죽인다. 이 때 이아고의 아내면서 데스데모나의 하녀인 이밀리어가 그 모든 것이 이아고의 잔인한 계략이었음을 알려주자 자신의 경솔함에 괴로워하며 끝내 자살하고 만다는 끔찍한 비극이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시조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오셀로의 단점이라면 자신의 아내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더 믿은 것이다. 워낙 그가 남의 말을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부정적인 속성 중 하나인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먹이로 삼는 초록눈을 가진 괴물’(셰익스피어)이라, 질투에 휩싸인 오셀로에게 데스데모나의 진실은 보이지 않았다. 오셀로는 자기의 목숨보다 더 데스데모나를 끔찍이 사랑했다. 오셀로에게 있어서 데스데모나는 삶의 등불이고 보람이었으며, 온 백성과 바꿀 수 없는 진주였다. 또한 데스데모나 역시 오셀로만큼이나 고결하고 순결한 여자로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자살’이라고 덮어줄 만큼 그를 사랑했다.

질투는 그런 오셀로의 사랑을 먹이로 하여 단숨에 그의 마음을 다 채우고 터질 만큼 자라났고, 결국 그는 자신의 생명 같은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만다. 데스데모나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침실로 들어섰을 때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든 데스데모나를 보는 순간 그의 질투는 그가 지녔던 사랑만큼 불타올랐으며 자제력을 잃어 버렸다.

17세기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라이머는 『오셀로』에 대해 이렇게 비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우리에게 확실한 도움이 된다. 첫째는 양가 규수들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흑인하고 사랑의 도주를 하면 끝내 어떻게 되는가를 경고해주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유부녀에게 손수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일깨우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남편들은 비극을 빚어내는 질투심을 품기 전에 과학적인 증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비평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손수건을 흘리는 행동은 오래전부터 애용되어 왔나보다.

어쨌든 사랑에 있어 질투심은 소유욕과 의심이 뒤엉킨 지독한 고뇌를 사람에게 선사한다. 이 질투심은 사랑에 흠뻑 빠졌을 때나, 이미 안정된 애착의 관계일지라도, 또 이미 헤어진 뒤에도 찾아 올 수 있다.

보통 여자가 더 질투가 심하다고 하지만 실제 사랑하는 관계에서 남자의 질투는 여자를 능가한다. 대개 여자의 질투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때 많이 느끼지만, 남자는 파트너가 성적으로 불성실할 때 더 질투를 하게 된다고 한다. 질투는 결국 여자에게는 남자의 아내 버림을, 남자에게는 여자의 외도를 막는데 본질적으로 기여한다는 뜻이렸다. 실제로 이 질투심 때문에 많은 여자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살해당하기도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여자들의 살해범은 많은 경우 전남편, 전애인, 현재남편과 애인들이다.

질투심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른 이가 접근할 때 눈에 불을 켜고 사랑을 지키게 하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셀로』처럼 사랑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질투심에 휩쓸렸을 때 자신의 마음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실 질투에 휘말렸을 때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다. 질투심은 염탐과 히스테리를 불러오고, 사랑의 관계를 흔들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공기처럼 사소한 것도 질투심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성서만큼이나 강력한 효력을 지니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에게 사랑의 증거를 많이 자주 요구할수록 상대는 피곤해지고, 지치게 되며, 감정의 소모가 많아지면서 결국 사랑에 등을 돌리게 된다.

연구에 의하면 무능력하거나, 자신감이 없고, 지나치게 상대에게 의존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질투한다. 곧 자존감의 문제인 것이다. 질투의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파트너에게도 신뢰를 가지고, 충분한 자유를 허락할 수 있다. 왜냐면 자기가 스스로 반짝반짝 빛을 내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글 : 배정원(성전문가, 애정생활 코치,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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