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동서로 갈라진 기독교

이재태의 종 이야기(47)

동방 정교회와 러시아 바실리카 성당

1999년 겨울에 우크라이나의 여성 공예가가 경매사이트에 올린 나무로 만든 러시아 성당 모양의 종을 보았다. 화려한 원색의 성당 건물, 동그란 첨탑위의 뾰족한 구슬모양의 지붕, 조금은 색다른 모양의 십자가가 있는 러시아 정교회 바실리카성당 종은 무척 아름다웠다. 경매가 종료되던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졸음과 씨름하며 경매에 참여하였다. 다행히 그녀가 올렸던 많은 나무 종들을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러시아 은행으로의 전자 송금은 쉽지 않았기에, 그녀가 사는 키에프의 주소에 구입가와 송료를 합한 금액을 특급 우편환으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한 달을 기다린 끝에 나에게 배달된 작은 소포에는 나무로 만든 3개의 작은 반지함이 들어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한 결과, 반지함은 같은 시기에 미국 텍사스의 할머니가 구입한 것이었고, 나의 종이 들어있던 큰 화물박스는 미국으로 배달된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삼자 간의 전자우편 연락 끝에 내가 받은 물품을 미국으로 보내고, 텍사스 할머니는 종이 담긴 큰 박스를 나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명백한 실수였으므로 내가 미국으로 보내고, 미국 아줌마가 나에게 보내는 상당한 금액의 우편료는 우크라이나의 그녀가 다시 부담을 하여야 했다. 미국으로 소포를 다시 보내고 2개월이 지나서야 나무 종은 나에게 도착하였다. 아래의 사진이 우여곡절 끝에 구입한 러시아의 목제 성당의 일부인데, 내부에 금속 종이 달려있다.

 

기독교는 1세기의 초대 교회에서 시작된 후, 로마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안티오키아(터키 소아시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 로마 등 5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5대 교회들은 유기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세계 공의회를 통해 기초 교리와 전례를 공식적으로 완성하여 기독교의 체계를 만들었다.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다. 이어 기독교를 국교화(392년)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심인 동방 지역은 장남에게, 로마가 중심인 서방은 차남에게 물려주어서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된다. 이에 따라 기독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이미 여러 면에서 불안정하였고 국가의 위상도 약화된 상태였으나, 로마 총대주교인 교황의 권위와 권력은 매우 컸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에 멸망하였음에도, 로마 교황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때부터, 교황은 전체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나섰다. 동방교회는 교황은 로마를 포함한 서방의 총대주교로서 자신의 교구를 관장하며 다른 교구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교황은 총대주교들 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재자로서 제일의 발언권을 가지는 명예로운 자리일 뿐이라고 하였다. 즉 서방교회의 수장일 뿐이며, 그 권한은 다른 교구의 총대주교들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성령은 성부로부터만 발현한다는 동방교회와, 성령이 성부와 함께 성자로부터도 동시에 발현한다는 서방교회 간의 신학논쟁으로 양쪽의 싸움은 가열되어 갔다. 

7세기경 이슬람이 번성하며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의 기독교 총 대주교좌 지역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점령지에서 기독교는 인정되었지만, 신도들은 이등시민 대접을 받았다. 기독교권은 로마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 대주교좌만 남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동로마 황제가 직접 지배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권위가 강화된다. 8~9세기 동로마 황제는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린다. 당시 이슬람들은 성상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므로 기독교 예배에서도 성상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했었다. 우상 파괴운동은 이슬람교에서 시작되었으나, 우상 배척은 기독교의 10계명에도 있었다.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교회에서도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유럽 지역은 성상 파괴 운동에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787년 동로마의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을 허용한다고 확정하며 성상파괴는 중지되었으나, 앙금은 계속 남았다. 이후 양교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마침내 1054년 동로마 황제가 로마 교회를 파문하고, 로마교회도 맞대응함으로서 완전하게 갈라지게 된다. 서방은 로마 총대주교를 교황으로 하는 ‘천주교’로, 동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세계 총대주교로 하는 ‘정교회(正敎會, The Orthodox Church)’로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 교회는 계속 교류를 하였다. 완전한 동-서교회의 분열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에 기인한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출전한 십자군은 원정길에 있던 동로마 제국을 침범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특히 성당의 제단, 십자가와 성상, 성인들의 유해를 탈취하고, 정교회의 성직자들도 함께 살상한 일은 동로마제국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교회 신도들은 로마에 대한 반감으로 동-서 교회의 합의도 거부하게 된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패망하며 이슬람 치하로 넘어가면서, 동서 교회는 영구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동방 정교의 선교는 동로마를 중심으로 슬라브 민족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9세기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선교를 하며, 문자가 없던 슬라브족을 위해서 문자를 고안하고 성서를 번역하였다. 러시아의 전교는 10세기에는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회를 국교화하고, 키예프에 첫 교회가 세워지면서 진행되었다. 현재 러시아 국민의 75%이상이 정교회 신자이다. 정교회는 종교의 역할 뿐만 아니라, 문맹을 퇴치시키고 때로는 법률의 역할도 했다. 나라의 통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 세계와 유대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정교와 함께 러시아에는 비잔틴 문화도 도입되었고, 이는 문학, 예술, 문화와 국민의 삶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의 영향은 건축에도 뚜렷해졌으며,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졌다. 비잔틴 양식의 프레스코, 모자이크, 부조 성화상이 건물 내부를 장식했다.

모스코바의 붉은 광장에는 성 바실의 바실리카(St. Basil’s Basilica) 정교회 성당이 있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의 큰 지붕이 있는 공공건물을 가리키는 라틴어였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이후에는 바실리카는 유서 깊고 교황이 특별한 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큰 성당을 말한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오래된 교회나 성인, 중요한 역사적 사건, 또는 정교회의 총대주교 등과 관련된 국제적인 예배 중심지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는 보통의 십자가인 라틴십자가와는 다르게 이중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의 다리를 받치고 있는 부분이 길게 기울어져 있어 ‘정의의 십자가 저울’이라고도 한다. 아래쪽 십자가의 오른편이 위쪽으로 높은 것이다. 예수가 처형될 당시에 양쪽에는 강도 두 명이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 중 예수를 섬기며 회개한 쪽인 오른쪽의 사형수는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갔으므로 십자가의 그 쪽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정교회는 그리스, 키프로스, 그리고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국가, 구 러시아의 여러 공화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체제와는 달리, 정교회는 국가별, 민족별로 각각의 정교회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연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로마 시절에는 그리스교회가 중심이었으나, 동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러시아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거쳐 분리된 정교회와 가톨릭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째 교리의 ‘삼위일체론’이다. 정교회는 성부로부터 성자 예수가 탄생하였으며, 성부로부터 성령이 ‘발현’한다고 한다. 가톨릭교회는 성부로부터 성자 예수께서 탄생하였고, 성자와 성부로부터 성령이 발현한다는 ‘이중발현’을 주장한다. 두 번째는 성체와 성혈이다. 정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성체와 성혈 두 가지를 먹고 마시는데 가톨릭에는 성직자들만 성체와 성혈 두 가지를 먹고 마시고 평신도들은 성체만 먹는다. 정교회는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고, 가톨릭은 전병 모양의 얇고 흰 빵으로 성체를 한다. 세 번째는 성상(聖像)의 차이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와 성모의 조각성상이 있으나, 정교회에는 성상을 깍지 않고 그림, 벽화로만 되어 있다.

네 번째는 성직자의 결혼문제이다. 가톨릭 성직자는 모두 미혼이나 정교회 성직자는 유부남과 독신남이 공존하고, 수녀들도 과부이거나 남편이 수사가 되어 수녀가 된 분도 있다. 하위 성직 사제는 결혼한 성직자도 맡을 수 있지만 주교는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만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신부가 된 후에는 결혼을 못하고, 유부남 신부는 부인이 죽어도 다시 결혼하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는 교황에 대한 문제이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주교 위의 주교인 분이나, 정교회에서는 교황을 많은 주교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한다. 모든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 서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정교회에는 ‘사도 위에 사도 없고, 주교 위에 주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 그리스에서 개최된 학회에서 회장 초청 연회가 마련되었던 아테네 근교의 중세 수도원을 방문한 기억이 있다. 버스로 한 시간 이상을 이동하여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나지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조용한 건물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만났던 그리스 정교회 신부들은 검은색 모자와 수도복 차림이었고, 모두 긴 수염을 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평화로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정교회와 아름다운 화음의 성가를 부르던 수도자들의 모습에서 코소보에서 이슬람을 학살하였던 세르비아 정교의 밀로셰비치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엄숙한 침묵 뒤에는 교리논쟁으로 분열을 거듭하며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핍박하던 종교의 배타적 야만성이 아직도 숨어있는 것 같다. 아니 IS(이슬람국가)를 통하여 나타난 것과 같이, 더욱 극단으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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