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게 죽고 미친 듯이 산 ‘낭만 기사’

이재태의 종 이야기(40)

우리 가슴 속의 낭만기사 ‘돈키호테’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Dream the impossible)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Do the impossible love)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Fight with unwinnable enemy)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Resist the unresistable pain)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를 소재로 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 나오는 노래 ‘이룰 수 없는 꿈(Impossible dream)’의 가사이다. ‘돈키호테’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환상을 잡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 ‘돈키호테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전후 사정이나 유-불익을 가리지 않고 일단 부딪쳐 보는 저돌적인 사람’,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정의라 공고하게 믿고, 허황된 소문임에도 큰 고민도 없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일에 너무 신중하고 소극적인 ‘햄릿형 인간’에 대치된다. 역사를 바꾼 위인이나,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세상의 유리천장을 과감하게 뚫고 나갔던 창의적인 사람들 가운데는 ‘돈키호테형 인간’들이 많았다고 한다.

1605년에 발표된 ‘돈키호테’는 669명의 인물과 46만 단어가 등장하는 방대한 소설이다. ‘최초의 근대 소설’, ‘성경 다음으로 많이 발간되었다는 소설’, ‘유럽 최초의 베스트셀러’란 찬사가 붙어있다. 2002년 세계의 작가 100명의 설문조사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으니, 세르반테스를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과거부터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방에서는 4월 23일이 되면 ‘세인트 조지의 날’이라고 축제를 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과 장미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었다. 1616년 4월 23일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1995년 유네스코는 ‘세인트 조지의 날’과 두 문호의 사망일이 겹치는 이날을 ‘세계 책의 날’로 지정하였다.

위대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는 마드리드 외곽의 대학도시에서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가 탄생하기 17년 전이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거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1569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이탈리아 주재 스페인 군대에 입대한다. 1571년 5월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결성한 신성기독교동맹 연합함대에 전투원으로 참여하여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몸에 두 발, 왼팔에 한 발의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평생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레판토 전투에서 동맹연합군이 승리하자 세르반테스는 부상당한 전쟁영웅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표현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르네상스 말기의 문화에 심취하였다. 이 후 1575년 스페인 해군사령관의 표창을 받은 뒤, 모국으로 귀국하려 한다. 하지만 바닷길에서 당시 동 지중해에서 악명을 떨치던 오스만 터키 해적들에게 잡혔다. 그는 알제리에 노예로 끌려갔고, 해적들은 그의 가족과 스페인 정부에게 몸값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보내기 위해 거의 5년 동안 많은 애를 썼다. 1580년 우여곡절 끝에 마드리드로 돌아왔으나, 이미 세르반테스의 가문은 엄청난 빚으로 몰락한 상태였다. 

1584년에는 18년 연하의 부유한 농부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한다. 그런데도 궁핍한 생활을 해결할 수 없어 일거리를 찾아 나서지만 끝내 직업을 구하지 못한다. 평소 “재물과 영광의 길은 문학 아니면 전쟁에 있다”고 말하던 그는 결국 문학작품의 집필에 매진한다. 1585년 처녀작 ‘라 갈라테아’ 이후 계속 희곡을 썼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돈키호테’ 1편을 발표하면서 유명한 작가가 된다. 그러나 판권을 헐값에 넘겼으므로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였다.

말년에 그는 귓바퀴에 항상 여러 개의 펜을 꼽고 있었으며, 다수의 치아가 흔들려서 고통을 받는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알제리에 잡혀 있었을 때 트리니티 종교인들이 해적과 가족, 정부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여 그의 석방을 도와주었는데, 그 인연이 계속되어 그는 사후에 마드리드의 트리니티 수녀원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1900년 경 스페인에서 제작된 높이 25cm의 묵직한 이 청동종의 손잡이는 스페인이 사랑하는 국민작가 세르반테스의 흉상이다. 종의 몸체에는 비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으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그의 시종 산초의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돈키호테’의 원 제목은 ‘라만차의 기발한 시골기사 돈키호테’이다. 이상주의적 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황당한 모험담을 통하여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렸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배경에는 당시 스페인이 마주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다. 해양 제국 시대의 최강자였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588년 칼레해전에서 영국 함대에 대패하며 대서양의 주도권을 영국에 넘겨준다. 식민지 네덜란드도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쇠약해진 스페인의 활동 영역도 이베리아 반도 내부로 축소된다. 이즈음부터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스페인 기사들의 이야기와 기사도 문학이 유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레콩끼스따(reconquista, 재정복)’라는 스페인의 독특한 기사도 정신도 관련되어 있다. 이는 이베리아반도를 점거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기 위하여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한 강인한 기사도 정신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스페인의 기사들은 8세기 이후부터 이슬람과 싸워 국토를 수복하고, 호전성과 진취성, 모험심으로 무장한 굳건한 카톨릭 국가를 건설하였다. 스페인은 강화된 해군력을 바탕으로 남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하며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된 영국의 해군에 대패하였고,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지 못한 레콩끼스따들의 영광도 소멸되어 갔다. 국내 정치는 폐쇄적이었고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다른 유럽국가와는 달리 스페인 왕가는 여전히 카톨릭 교회 권력과 강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강력하였던 옛 스페인의 영광에 집착하며, 그 시대를 지배한 중세적 기사도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유행한 것이다. 세르반테스 자신이 기록으로 남긴 바와 같이, 이 같은 풍조를 조롱한 문학작품이 ‘돈키호테’였다. 그는 구시대를 추앙하며 집착하는 망상가의 모습을 빌려 당시 스페인의 교회권력, 지배층의 위선과 타락을 우회하며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조소와 풍자를 통해 시대에 뒤처진 어느 기사의 모습을 그린 소설책이다. 시골마을 라만차에 사는 몰락한 귀족 아론소 키하노는 중세의 기사도 소설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진짜 기사가 되었다는 망상에 빠진다.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 짓고, 비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 곳곳을 돌며, 불의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삶을 사는 중세의 기사도를 꿈꾼다. 쉰을 넘긴 나이에 모험을 찾아 세상을 방랑하는 편력기사(遍歷騎士)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녹슨 투구와 집안에 돌아다니던 쇠붙이 조각을 조립한 갑옷,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돈키호테의 출정은 세 번에 걸쳐 이어진다. 첫 출정은 혼자였지만 두 번째 출정에는 산초를 시종(侍從)으로 동반하고 나섰다. 똑똑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농부 출신 판사 산초는, 이상하게도 ‘섬 하나를 주겠다’는 말에 시종이 되기로 하고 그를 따라나선다. 기사 돈키호테는 못생긴 시골처녀 둘시네아를 그의 연인으로 마음에 심어놓았다.

아래의 거북은 라만차가 속한 중부 스페인의 도시 톨레도 지방의 특산품인 탁상종이다, 여기에도 사랑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머리나 꼬리를 누르면 ‘따르릉’ 소리가 난다.

돈키호테가 명작인 이유는 약골의 키다리 기사 돈키호테와 산초가 보여주는 절묘한 조화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기사도 정신을 숭상하며 모든 세속적인 것들에 앞장서서 싸우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인물이다. 산초는 작은 키에 뚱뚱한 몸매, 그리고 금욕에 눈이 먼 기회주의적인 사나이다. 그러나 서로 판이한 이 두 사람은 전편에 걸쳐 절묘하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활동을 한다. 기사가 된 돈키호테는 거드름을 피우며 산초의 행동에 대해 지적을 하나, 산초는 이러한 돈키호테에 강하게 반대하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서로 비슷한 두 사내가 친구처럼 정답게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해 가는 모습이다. 시골인 라만차와 주변 마을 사람들도 돈키호테의 출정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 시작했고, 그들을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삼고 즐기기도 하였다. 그를 조롱하기 위해 귀족의 행세를 하며 작위를 내려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가엾다며 그를 돕기도 한다. 사실 그가 그렇게 진지하게 대했던 못생긴 둘시네아 공주도, 여관에서 거행된 기사 서임식도, 거대한 거인인 풍차와의 대결도 그의 망상 속에 보인 실체가 없는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행동은 돈키호테의 엉뚱함에 동감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지막 출정에 나선 돈키호테는 백기사와의 결투에서 지고 귀향길에 올라 기사로서의 세상 편력을 마감한다. 임종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자신이 망상에 빠진 미치광이 기사가 아닌 본래의 착한 알론소 키하노로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자신이 백해무익한 기사소설을 지나치게 탐독하여 편력기사라는 망상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던 일을 후회하면서 기독교도로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존재 이유가 없어진 한 시대의 아이콘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죽음에 현실주의자 산초는 눈물을 흘린다. 그의 묘비에는 “죽을 땐 현명한 사람이 돼 죽고, 살 때는 미친 듯이 살라.”고 새겨져 있다.(김환영, 동아일보 2009.10.09.)

‘누가 미친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들이 미친 거요?’ 돈키호테가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던진 말이다. 그의 낙천주의에 매혹된 시대의 영웅들은 각자 자기야 말로 진정한 돈키호테라고 주장한다.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역사에서 3대 바보는 예수, 돈키호테 그리고 나다”라고 했다. 혁명가 체 게바라도 ‘자신이 이 시대의 돈키호테’라고 편지에 썼다.

필자는 돈키호테를 생각하며, 1936년 발표된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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