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2만여명 수술, 90% 아름답게 완치

서울아산병원 안세현 교수(58)는 환자들 사이에서 ‘백발 도사’로 불린다. 하얀 머리카락에 온화한 인상, 부드러우면서도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어울려 환자를 안심시킨다. 내공 깊은 도사가 으레 그러하듯 손길도 섬세하고 재빠르다. ‘안세현 문파’는 유방암 환자 2만5000여명을 수술해서 90% 이상을 완치시켰는데, 환자의 젖가슴을 아름답게 보존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다른 의사들은 환자의 수술 부위를 보면서 놀란다. “누가 수술했어요? 아, 역시…”

학창시절 ‘요주의 학생’… 밤이면 야학, 근로자와 동고동락

안 교수는 1975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서 다른 친구들이 낭만을 즐길 때 ‘고생길’을 자처했다. 야학 동아리에 들어서 매주 두 번 수업이 끝나면 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가 이끄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교회로 가서 여공 20여명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한자를 알아야 신문을 볼 수가 있고, 신문을 봐야 세상을 압니다!”라며. 겨울방학 때에는 두 달 동안 구로공단의 손거울 공장에 취업해서 근로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

“저 자신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서 가난과 친할 수밖에 없었지요. 중학교 때에는 등록금을 못내 학교에서 쫓겨나 눈물을 삼키며 귀가한 적도 있지요. 타박타박, 그 길이 얼마나 멀던지… 기독교인으로서 누군가를 도와야겠다는 소명의식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의사의 길을 지원한 것이고요.”

안 교수는 학창시절 시쳇말로 ‘요주의(要注意) 학생’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그는 군의관 전역을 앞두고 대학 동기 모임에 갔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아산병원(당시 서울중앙병원)이 민병철, 김석구, 박건춘, 김인구, 이승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칼잡이’들을 스카우트해서 외과를 꾸렸고 2명의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접수가 끝난 지 1주일이 지났고 동기들 몇 명은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 모집 마감 불구 집요한 도전… 아산병원 합류 성공

“좋은 기회였는데 아깝네, 하고 아쉬워하다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안 교수는 병원 의사를 모집하는 아산재단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방법이 없겠느냐고 졸랐다. 담당자는 “접수와 채점이 끝나서 이틀 뒤 이사회에 보고할 예정이어서 지원이 불가능하다. 외과 과장으로 내정돼 있는 민병철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의 도장을 받아오면 몰라도…”

안 교수는 일면식도 없는 민 교수를 다짜고짜 찾아갔다. 민 교수는 처음엔 ‘당돌한 의사’를 보고 데면데면했지만 이력서의 성적표를 보면서 낯빛이 달라졌다. 형 세 명, 누나 세 명이 있는데도 부모를 모신다는 사실에 눈빛마저 달라졌다. 민 교수도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민 교수가 지원서에 도장을 찍어줘 가까스로 접수할 수 있었다. 그는 20대 1의 경쟁을 뚫고 송파구 풍납동의 새 병원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밤낮으로 수술… 국내 최대 기록 세우며 ‘대 문파’로 성장

안 교수는 원래 간이 전공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간이식에 성공한 김수태 교수의 제자로 석사, 박사 학위 논문도 썼다. 그러나 서울아산병원에는 이승규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다. 이 교수는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대장을 전공했지만, 새 병원에서 간을 맡기로 돼 있었다. 안 교수는 박건춘 교수 밑에서 유방과 갑상샘 수술을 맡았지만, 사실상 모든 교수의 ‘조수’였다. 말이 전임의였지, 전공의가 1년차 2명뿐이어서 전공의 1~3년차, 치프 역할까지 함께 맡을 수밖에 없었다. 오전과 낮에 교수 수술이 끝나면 저녁에 응급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면 중환자실을 맡아야 했다. 파김치가 될 시간도 없었다. 별명이 ‘밤 도깨비’였다.

1990년대 초 만해도 우리나라엔 유방암 환자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서울 공릉동의 원자력병원에 환자가 몰렸다. 안 교수는 1992년 유방암클리닉을 열어 유방암 환자를 중점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식생활 서구화와 인구 고령화 등에 맞물려 유방암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 환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안 교수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1996년 안 교수 팀은 국내 최다 수술 기록을 세웠다. 2009년에는 국내 최초로 유전성유방암, 젊은 유방암, 재발 유방암, 수술 전 항암치료, 평생건강클리닉 등 5개 전문 클리닉으로 구성된 유방암센터를 열었다. 현재는 외과, 가정의학과,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신경정신과, 산부인과, 성형외과, 병리과 등의 의사 30명과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50여명이 국내 유방암 환자 13%를 보는 ‘대 문파’로 성장했다.

안 교수 팀의 수술 뒤 5년 생존율은 90%를 훌쩍 넘어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유명 병원보다 실적이 좋다. 안 교수는 1990년대부터 수술 부위를 최소화해서 흉터가 적은 다양한 수술법을 개발해 보급해왔다. 2000년대 초부터는 수술이 끝나자마자 유방을 복원하는 ‘동시 유방암 복원술’과 젖꼭지와 젖살을 최대한 보존하는 수술법을 개발해 보급해왔다.

환우회 문화 정착 선도… 여가서도 도사 면모, 밤낚시 즐겨

안 교수는 환자 모임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 병을 이기도록 이끄는 활동에도 열심이다. 서울대 의대 동기인 노동영 서울대병원 교수와 암 환우회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안 교수의 환자들은 봉사단체인 ‘새순회’와 교우(交友)모임인 ‘핑크리본 회’를 통해 서로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안 교수는 10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찜질방에서 환자들의 애환을 들었다. 2005년에는 방사선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6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1억6000만원 대출을 받아 병원 인근에 아파트 전세를 마련하기도 했다.

안 교수는 여가 생활에서도 ‘도사’의 면모를 풍긴다. 그는 10여 년 동안 밤낚시를 즐겨왔다.

“전임의 때 새벽에 응급수술을 마치고 수술방 창밖을 보면서 ‘내게도 봄볕 저수지에서 혼자 낚시할 시간이 올까’하고 꿈꾸었지요. 40대에 들어서 생활이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바뀌면서 꿈을 현실로 옮겼고 그게 20년 가까이 지속됐습니다.”

그는 2008년 낚시를 제대로 즐기려고 강원 춘천시 변두리에 300평짜리 못이 있는 1000평 규모의 땅을 샀다.

“넓은 땅에서 옥수수, 고구마, 감자, 고추 등의 농사를 지으며 잡초와 전쟁을 벌이다보니 우아한 밤낚시는 손에 꼽을 정도고, 주말 농군이 됐지요. 이전에는 회진 때 빨리 걷기, 24시간 숨쉬기, 맥박운동 외에는 운동을 할 짬조차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건강을 관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안 교수는 주말에는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자연의 삶을 꾸린, 미국의 생태학자 스코트 니어링 같은 삶을 살다가 월요일에는 ‘백발의 의사’로 되돌아온다. 잡초와 전쟁을 벌이며 채소들을 살리듯, 암과 싸우며 환자들의 생명과 가슴을 살린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유방암 수술 베스트닥터에 안세현 교수

안세현 교수에게 물어본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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