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달은 스승의 깊은 뜻…‘참 의사’ 한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1987년 10월 어느 날 서울대병원 문형노 교수의 연구실. 문 교수의 앞에는 제자인 양세원 영등포 충무병원 소아과 과장이 앉아있었다. 제자는 2년 전 전공의를 마치고 스승 곁에 남고 싶었지만, 단칼에 거부당하고 개인병원에서 환자를 보다가 스승의 호출에 불려왔다. 미국 유학파인 스승은 예리하고 명쾌한 판단으로 ‘천재’로 평가받은 의사. 제자들에게는 호랑이와도 같이 엄했다.

“내 후계자 돼 달라” 스승의 제안 처음엔 농담인줄…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하나?”

“언젠가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하면서 환자를 보고 싶습니다.”

“…”

“…”

“경남 진주에 생기는 경상대병원에 갈 수 있겠는가?”

“감사한 말씀이지만 부모님을 모셔야 하기에, 그건…”

“그럼 인하대에는 갈 수 있겠는가?”

“기꺼이 가겠습니다.”

“…”

“…”

“본교에 남겠는가?”

스승의 갑작스런 제안이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양 박사의 머리에는 전공의 2년 때부터 스승과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스승이 말을 이었다.

“나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자네를 내 후계자로…”

양 교수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양 교수는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스승이 왜 자신을 후계자로 삼았는지, 왜 2년 전에는 전임의로 남고 싶다는 소망을 매몰차게 거절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스승은 제자가 소아내분비 분야의 의사를 소명으로 삼아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을 눈여겨보며 대견하게 여겼지만 당시 전임의를 맡겨도 교수 자리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제자가 개원가에서도 의대 선배들과 함께 경기 고양시 일영YMCA 수련관에서 국내 최초로 소아당뇨캠프를 연 것을 알았을 때에도 속으로만 기뻐하다가 교수직이 나자 곧바로 연락했던 것.

양 교수는 이듬해 2월 서울대 의대로부터 교직 발령을 받고 스승과 함께 어린이 당뇨병과 대사질환에 대한 연구 진료 분야를 개척했다.

국내 첫 소아당뇨교실 열어… 교육, 연구에 모든 정성

그는 1987년 국내 최초로 소아당뇨병교실을 열었으며 같은 해 대한소아내분비연구회의 닻을 올렸고 학회로 순항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병원에 소아당뇨병 교육팀을 만들어 소아당뇨캠프와 접목, 어린이 당뇨병 환자가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두 차례에 걸쳐 국내 소아당뇨병의 발생률을 조사했다. 췌장의 기능에 문제가 생겨 인슐린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는 ‘1형 당뇨병’의 유전적 경향이 한국인에게서 어떠한지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최근에는 비타민 D와 비만 및 당뇨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그는 소아당뇨병에 대한 다양한 교육용 책자를 발간했고 《소아당뇨병, 올바로 알고 관리하기》 등의 책을 통해 당뇨병에 대한 대중의 오해와 편견을 씻어내는 일에도 열심이다.

당뇨병뿐 아니라 다양한 선천성 대사질환의 연구와 치료도 주도했다. 1989년 서울대병원에서 신생아 선천성 대사질환 선별 검사 프로그램을 확립해서 이 병들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1989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사우스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성장호르몬 연구의 대가인 배리 버큐 교수의 문하에서 밤낮으로 원숭이와 쥐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한 뒤 국내에서 성장호르몬을 이용한 질병 치료의 지침을 세우는 데에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지금 남녀의 성호르몬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부모의 성호르몬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이 가장 큰 관심사이지만,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안타깝다.

양 교수는 전국에서 밀려오는 1형 당뇨병, 뇌하수체질환, 갑상샘질환, 성선 및 부신 질환, 뼈대사 질환, 비만, 고콜레스트롤 환자 등을 보면서 50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환자들을 보면서 또 다른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양 교수는 학회 활동에서도 열심이어서 대한소아내분비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대한소아과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완치돼 행복 찾은 환자들 보며 ‘나의 길’ 되새겨

양 교수는 어머니가 소아과 의사였지만 고3때까지 어머니의 길을 따를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항공과학자가 돼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선을 설계하며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1971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2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똑똑한 공대생들이 취업 걱정을 하는 것이 신문 기사로 오르내렸다. 아버지는 공대 대신에 의대를 권했다. 의사는 굶는 걱정은 없다며. 어머니는 밤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 때문에 밤에 환자를 보러 뛰어나가야 했고 늘 환자 걱정을 해야 했지만, 가족을 먹여 살렸고 큰 걱정 없이 공부를 하게끔 버팀목이 된 존재였다. 내가 어머니 이상으로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의대에 지원서를 냈다.

양 교수는 인턴 때 어머니의 전공 분야였던 소아과에 지원했다. 어머니와 다른 길을 가고도 싶었지만 의대 실습 때부터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전공의 2년차 때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가면서 스승의 그늘에 들어갔다. 문 교수의 그룹, ‘문방(文房)’의 문하가 됐고 마침내 ‘방장(方丈)’이 됐다.

양 교수의 연구실 책장 가운데에는 어른 주먹 크기의 히포크라테스 흉상이 2개 있다. 그 뒤편으로 1994년 퇴임하고 3년 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난 스승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다. 진료와 연구의 벽에 갇혔을 때 스승의 사진을 보면서 되묻는다. 스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승은 생전에 ‘참의사의 길’에 대해서 화두를 던졌다. 양 교수는 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질문을 던진다. 그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20~30년 전 희귀한 병 때문에 울면서 찾아왔던 환자들이 아이를 낳고 가족이 함께 병원으로 인사 올 때에는 “내 길을 잘못 가지 않았구나!”하며 행복감에 젖는다.

소아당뇨분야 베스트닥터에 양세원 교수

양세원 교수에게 물어본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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