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아기들의 수호천사… ‘전설의 칼잡이’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주세요. 애원해요. 선생님, 제발…”

1998년 어느 날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산부인과 진료실. 28세의 여교사가 당시 45세였던 이근영 교수(62)에게 호소했다. 여교사는 임신 25주 째. ‘아기의 궁전’인 자궁(子宮)은 임신 기간에 문이 꼭 닫혀 있어야 하는데, 자궁이 압력 탓에 부풀어 올라 문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당시로서는 아기가 세상의 빛을 봐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교수는 그해 초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세계모체태아학회를 떠올렸다. 당시 한 이탈리아 의사가 시험적으로 ‘자궁의 문’에 해당하는 자궁경부를 꿰매는 수술을 했다고 발표했던 것. 이 교수는 귀국해서 과연 그 수술이 타당한지, 성공률을 높일 수 있겠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궁경부봉합술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해 본 적이 없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저를 믿고 수술대에 오르겠습니까?”

자궁 무력증 환자 수술 세계 최고…매년 4,5차례 국제 강의

이 교수는 자궁의 양수 200여 ㏄를 천천히 빼면서 양막을 밀어 넣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행여 양막이 터질까 조금씩, 조금씩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자궁경부를 꿰맸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여교사는 만삭인 상태까지 임신을 유지했고 공주를 순산하는 데 성공했다. “자궁무력증 환자도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여교사의 딸은 공부를 잘해 반장도 하고…”

이 교수는 자궁의 문이 일찍 열려서 조산에 이르게 되는 ‘자궁무력증’ 환자에게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주는 수술에서 세계 최고의 칼잡이로 통한다. 매년 4, 5차례 국제 학회와 세계적 병원 등에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강의한다.

조산은 임신 37주가 안 돼 아기를 낳는 것으로 전체 출산의 8~9%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10%는 자궁경부무력증이 원인이다. 인체의 오묘한 원리에 따르면 16~23주는 ‘자궁 입구’인 자궁경부가 닫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미리 열리거나 자궁의 양막이 부풀어 풍선처럼 튀어나오면 조산으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1998년부터 질 안에서 자궁경부를 묶어주는 ‘맥도날드 수술’을 이끌어 왔을 뿐 아니라, 2002년부터 배를 절개하고 임신된 자궁을 꺼내 입구를 묶는 ‘복식자궁경부봉합술’을 퍼뜨렸다. 복실봉합술은 양막이 터지면 태아가 바로 사망하는 초고난도의 수술인데 이 교수는 이 수술로 500여 명의 아기를 살려냈다.

다른 곳서 포기한 자궁경부암 임신부 수술… 쌍둥이 모두 살려

2006년 32세 환자의 쌍둥이를 복식봉합술로 살려낸 것은 산부인과에서 전설로 꼽힌다. 환자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서도 자궁을 들어내지 않겠다고 버틴 ‘강심장.’ 자신의 생명보다 여자로서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국립암센터에서 자궁의 본체는 보존하고 경부만 절제하는 방사선시술을 받았다. 복강경 수술로 암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림프절도 잘라냈다. 그리고 시험관 시술을 통해 쌍둥이를 임신했다.

환자의 산부인과 주치의는 두 아이 중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을 권했지만, 환자는 이번에도 앙버텼다. 두 아기 모두 살려내라고. 의사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자, 환자는 이근영 교수를 찾아왔다. 이 교수는 복식자궁경부봉합술을 통해 두 아기를 모두 살렸다. 이 사례는 2007년 미국 산부인과학회지에 발표돼 호평을 받았다.

학자로서도 세계적 명성…수술 기구 발명, 특허도

이 교수가 수술에만 능한 의사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자궁경부무력증의 원인과 진행을 연구하는 학자로서도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이 교수는 밤늦게까지 양막·양수의 변화와 자궁무력증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다, 우연히 교실에 배달된 병리학 잡지의 제목을 보고 눈을 비볐다. 토끼에게 백혈구의 일종인 호산구를 주사했더니 자궁경부가 흐물흐물해졌다는 내용이었다. 호산구는 면역계의 전쟁에서 ‘아군 병사’에 해당하므로 전쟁이 자궁경부 무력증의 원인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진 것. 인체에서는 염증반응이 전쟁터에 해당하므로 염증반응이 자궁경부무력증의 원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2004년 이 교수는 양수 실험을 통해서 자궁경부무력증 환자는 정상 임부에 비해 염증반응 관여 물질인 인터류킨-6(Il-6)이 현격히 많다는 사실을 밝혀내 미국산부인과학회지에 발표했고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감염이 탈락막하 출혈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유전자와 단백질 차원에서 밝힌 논문으로 같은 학술지의 ‘편집자 선정논문’에 뽑혔다.

2009년에는 자궁경부봉합술 때 양막을 균등한 힘으로 밀어 넣어 터질 위험을 줄인 기구를 개발해서 미국 특허와 EU 마크를 받기도 했다.

지구촌 매년 1500만 명 조산…‘두 생명 살리는 직업’ 매력

이 교수는 하늘의 운이 자신이 고위험 임신부를 돕는 천직으로 이끌었다고 믿는다.

“의사이지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신설학교인 중앙대 의대에 가는 것이 교직에 남는 데 유리하다고 추천했습니다. 학생 때부터 두 생명을 살리는 산부인과를 매력 있게 생각했지요. 마침 거기에는 김두상, 우원섭, 강성원 교수 등 당시 산부인과의 대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1988~89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병원과 메릴랜드 대학병원의 산부인과를 함께 책임 진 데이비드 내기 교수 문하로 연수를 가서 초음파 기법에 대해서 갈고 닦았다. 보통 외국에서 연수 온 의사에게 환자를 맡기지는 않지만 내기 박사는 열정에 찬 한국 제자에게 환자 진료를 맡겼다. 이 교수는 한밤중 의사가운을 입고 우범지역인 병원과 숙소를 오가며 실력을 연마했다.

이 교수는 귀국 후 고위험 임산부를 보다가 자궁경부무력증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고위험 자궁경부무력증 환자 1000여 명에게 아기를 선사했지만, 진단과 치료에서 좀 더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 꿈이다. 매주 200명의 환자를 보고, 한 달에 5, 6번은 밤에 응급수술을 하러 병원을 향한다. 한 해 300명의 임부를 수술한다.

그는 치료 과정에서 얻은 양수, 자궁경부 점액, 질 점액, 혈청, 태아의 혈액, 태반, 신생아 분비물 등이 열쇠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 교수의 ‘바이오 뱅크’에는 세계에가 가장 풍부한 자료들이 있다. 미국 코넬대 의대가 공동연구를 제안할 정도다.

“UN은 2012년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산’을 선정했습니다. 매년 1500만 명이 조산으로 태어나고 이 가운데 110만 명이 숨집니다. 나머지 상당수가 장애를 안고 힘들게 살아가고요. 제가 운영하는 바이오 뱅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꿈꿉니다.”

 

모체태아의학 베스트닥터에 이근영 교수

 

이근영 교수에게 물어본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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